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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앤 드라마

[정세랑 SF] 지구에서 한아뿐, 사랑 찾아 2만 광년을 달려온 외계인

by 아브라™ 2021.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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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2019)은 2012년 출간된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절판되었다가 2019년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작가 정세랑은 그녀의 첫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2020)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오가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정세랑은 극단적 환경주의자라는 말을 자주 듣는, 지구에 대한 사랑이 (좋은 뜻으로) 유별난 작가입니다. 소설상 공모전 최종심의에서 아홉 번이나 떨어지고 데뷔한 이력도 있어 특히 애착이 가는 소설가입니다. 저는 실패에도 다시 일어서고야만 사람들에게 끌림이 심한 편입니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주인공은 '환생'이라는 아주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 '한아'입니다. 한아에게는 만난 지 11년이나 되는 애인 경민이 있습니다. 별로 볼 것도 없는 한 남자와 11년째 연애 중이라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지요? 결혼생활 11년도 어려운 현실을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네, 한아는 진득하기 이를데 없고 묵묵히 전탄소 생활을 실천하고 변화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친구 유리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는 한아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요.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습관처럼 계속 만날 필요는 없어, 멈춰도 돼. 이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들면 언제든 멈추는 거야"

 

유리의 말은 백번 맞는 말입니다. 사실 요즘은 너무 빨리 멈추는 것이 문제지만요. 경민은 한아를 살갑게 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아를 진중하게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더구나 변변한 직장에도 다니지도 않는 남자라면 누구나 유리처럼 친구를 위하여 조언을 마다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경민은 캐나다에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뉴스를 듣고는 그걸 보러 가겠다며 그나마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떠나는 친굽니다.

 

"아냐, 금방 다녀올게. 정말 멋질 거야. 이날을 몇 년이나, 몇 년이나 기다렸다니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경민은 분명 어른이 아닌 소년입니다. 아, 저라면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우리의 착한 한아는 잘 다녀오라고 작별 인사를 합니다. 사실 속마음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저도 유성우를 보러 캐나다에 가고 싶기도 합니다만, 역시 실행은 하지 못할 것 같군요.

 

<지구에서 한아뿐>은 판타지 소설입니다. 줄거리를 추려보면 많이 허무맹랑합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읽으면 지구를 사랑하게 되고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한아는 나중에 애인 경민의 이름도 재활용하고 경민이 그 자체도 재활용해서 쓰게 되는 셈입니다. 이 얼마나 저탄소 생활에 충실한 삶입니까.

 

어쨌든 캐나다에 갔다온 경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전에 없이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고 무엇보다 한아를 사랑하는 남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경민의 이상한 변화를 감지한 한아가 하는 수없이 국정원에 전화로 도움을 요청합니다.

 

"흉터가 없어졌고요. 못먹던 가지도 먹었다니까요... 어디로 훌쩍 떠나지도 않아요!"

 

이러한 신고 전화를 받은 국정원 요원의 답변에 저는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가지를 먹었다고 국가정보원이 움직일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시 연락 주십시오.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구에서 한아뿐>에는 이렇게 빵빵 터져주는 소소한 재미도 제법 있습니다.

 

이후의 스토리는 소설을 읽어보시면서 직접 음미해보시길 강력 추천드립니다. SF 소설답게 우주적 사랑이 펼쳐집니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한아와 있기 위해 무려 2만 광년을 달려왔다는 외계인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정세랑은 <지구에서 한아뿐>을 통해 한아를 지구에서 하나뿐인 존재로 격상시켜 놓습니다. 그 별 전체가 사랑하는 여성, 한아로 말입니다. 그리고 소설 속 작가의 말처럼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하고 계속되기도 한다."는 걸 믿으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명문장

"흐어어어엉, 그 나쁜 새끼, 그럴 줄 알았어. 망나니 새끼. 지구 밖까지 도망가다니. 어떻게 나한테 이래?!"

 

작별도 없이 도망간 경민에게 분이 다 풀리지 않은 한아는 '다이옥신 같은 새끼, 미세먼지 같은, 아니 미세 플라스틱 같은 새끼, 낙진 같은 새끼, 옥티 밴존, 옥 시녹세이트 같은 세끼...'로 이어지는 아주 귀여운 욕설을 멈추지 않는데요. 저탄소 생활을 하는 한아가 욕설조차 저탄소를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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